풍수지리(風水地理)라는 말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드믈 것이다. 풍수지리는 오래전부터 이 땅에 뿌리를 내린 학문이다. 우리 조상의 지혜가 모아진 학문이며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이 기온과 바람, 풍수해(風水害)와 같은 자연의 현상과 싸워오고 살아남은 기록을 모은 것이다. 이이 땅에 사람이 살아오며 적을 물리치고 생존을 위협하는 맹수를 이겨내기 위해 혈거(穴居)와 목책(木柵) 같은 시설을 만들고 나아가 집을 짓고 성벽을 축조하면서 양택의 근본이 결정되고 산야에 적용되었다.
아주 오래 전, 혈거생활부터 축척되어진 풍수지리의 이법은 정통, 혹은 전통이라 불리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신라시대 들어와 중국의 풍수가 대량 유입되어 학문적 기틀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풍수지리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가설만은 분명하지 않다. 애초에 이 땅에는 이미 오래전에 자리한 전통풍수(傳統風水)가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자생풍수(自生風水)라고 불리는 이 땅의 풍수지리 이론과 구조적 효용성은 중국의 풍수를 받아들임으로 학문적으로 정립되고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라말려초의 기승 옥룡자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널리 알려지고 퍼져나간 풍수지리는 이 땅의 허한 부분을 보충하고 모자란 것을 채우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이법을 등에 업고 바람처럼 퍼져나갔으며, 결국 고려 건국 후에 통치이념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고려를 거쳐 발전을 거듭한 풍수지리는 조선조에 들어 유교의 융성과 왕권의 집중적인 견제로 위축되는 듯하였지만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보이듯 그 뿌리를 잃은 적은 없었다.
조선말엽 이 땅을 침탈한 일본인들은 우리 고유의 사상을 유학이나 불교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풍수지리에서 찾았다. 따라서 풍수지리를 말살시키는 것이 조선의 정신을 붕괴시키는 것으로 보아 풍수지리를 미신으로 몰아붙이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후 해방이 되며 잠시 주춤했던 풍수지리는 예전의 지위를 찾으며 민생 깊이 파고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풍수가 미신이라거나 묘를 쓰는 기법만으로 여기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풍수는 음택(陰宅)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서 반드시 필요한 필수 요소인 양택(陽宅)을 더욱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풍수는 오래도록이 땅에 내려오는 신앙과 같았다. 풍수는 이 땅에서 종교와 계층, 학력에 관계없이 적용되었다. 어느 지역에서 인물이 나오면 조상의 묏자리가 어떤지를 살피려고 하고 박사만 나와도 집터를 살피려 하였다. 이제는 명당에 대한 개념 역시 많이 희석되었지만, 아직도 사회지도층이나 일부 재력가들은 좋은 땅을 찾고 있으며 극도로 발달된 양택의 이점으로 풍수의 기를 다루려고 애를 쓰고 있다. 많은 폐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폐단이 미신이 아니라 지나친 신봉 때문이었다. 조선말의 실학자 들은 풍수지리의 지나친 신봉을 비판하였지만 미신이라는 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최근에는 자연보호의 이념에 편승하고 편리성을 추구하고자 매장문화가 사라져가며 화장이 사회현상으로 대두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먼저 양택의 발전이 대한민국의 풍수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며 반드시 의지해 하는 집. 양택이란 바로 이 집을 말하는 것이다. 이 집의 올바른 기운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떤 집을 짓고 살아가는가에 따라 사람의 명예가 달라진다는 것은 옛 풍수의 “인걸지령(人傑地靈)”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