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최대의 쇼〈엘비스〉
팝음악 역사에서 가장 큰 이름인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것이 더 남아있을까? 백인 청년이 흑인음악인 블루스를 ‘니그로보다 더 니그로스럽게’, 동물적이고 원시적인 춤을 추며 등장하여 마침내 로큰롤의 수퍼 스타가 되었다는 이야기. 아메리칸 드림이 만인에게 가능했던, 가능 하다고 믿던 시대의 성공 아이콘이자 미국 대중문화 사상 최초로 여성 팬덤을 출현시킨…그리고 미스터리로 남은 죽음...
이 영화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톰 파커, 엘비스 평생의 단 하나뿐이었던 매니저이다. “나는 엘비스에게 세상을 안겨주었고, 미국에게는 지상 최대의 쇼를 선물한 사람”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텍사스지역 신인 스타였던 엘비스를 순식간에 전국구 수퍼스타로 만든 톰 파커는 자신의 말대로 엘비스를 세상에 내보냈지만 또한 엘비스를 세상의 끝으로 밀어내어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 영화는 톰 파커의 나레이션으로 엘비스에 관한 새로운 전기적 사실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엘비스를 좀 더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가 미국 팝음악의 역사만 바꾼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려했다는 것.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영화의 즐거움은 거기에 있지 않다. <엘비스>는 바즈 루어만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사방에 터지는 불꽃놀이처럼 엘비스의 화려한 무대가 재현되고, 엘비스역을 맡은 오스틴 버틀러의 눈을 뗄수 없는 모사연기가 있다. 수줍은 효자였던 엘비스가 번들거리는 핑크색 수트에 화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 다리를 떨고 골반을 흔들기 시작하면서 전혀 다른 인간으로 변모하는 그 첫 순간의 놀라운 변신장면은 잊기 힘들다. 청교도의 후예답게 조신했던 50년대 미국 여성들이 성적 쾌감을 못이겨 발작적으로 호응하는 이 첫무대의 묘사는 <물랑루즈><위대한개츠비>의 그 과하다 싶을 정도였던 루어만 감독의 두려움 없는 카메라가 <엘비스>에 이르러 바로크 풍의 격동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파벨만스〉, 천사여 고향을 돌아보라
우리가 부모님을 그저 한 인간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 까? 스티븐 스필버그는 7살부터 18세까지, 그가 부모의 영향아래 있던 시간 동안 그에게 일어났던 가장 충격적인 2개의 사건을 돌아 보면서 자신의 삶과 가족, 그리고 예술이 어떻게 충돌하고 조화하는지 고백한다.
세상에는 영화에 대한 영화,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가 수도 없이 많고, 특히 펜데믹 기간동안 많은 감독들이 내성적인 시간을 가지면서 자기반영적인 영화들을 쏟아냈지만 <파밸만스>처럼 솔직하고 또한 시네마적인 성취를 이룬 작품은 없을 것이다.
<ET> <캐치미 이프 유 캔> <AI>등 스필버그의 모든 영화에는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는 “왜 스필버그가 영원한 피터팬으로 불리는지, 왜 스필버그 영화에는 섹슈얼리티가 없는지”에 대한 오래된 의문에 대한 대답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가족 캠핑 때 찍은 영상을 편집하는 소년 스필버그의 모습을 편집하는 약 3분간의 무성 영화 같은 장면은 이 영화의 심장같은 장면이고, 마지막 장면은 올해 나온 모든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앤딩 장면이다.
주인공이 스튜디오 마당을 걸어갈 때, 카메라가 제4의 벽을 깨고 수평선을 다시 재 프레이밍하는 마지막 숏에서 우리는 그가 영화라는 미디엄의 거장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않는다.
〈타르〉, 추앙과 전락의 드라마
고전 비극의 영원성은 전락의 드라마에서 나온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신데렐라식 성공담이 강력할수록 반전과 추락의 낙하감이 크고 관객들은 깊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엘비스>와<타르>의 작법은그런 점에서 비슷하다.
<타르>의 여주인공 리디아 타르가 관객에게 소개되는 첫 장면은 다큐처럼 제시된다. <뉴요커>의 저널리스트(실제인물 고프닉 아담이 그 자신을 연기한다)가 타르를 소개하는 길고 멋들어진 오프닝과 대담장면은 이렇다할 기교가 없이 단순한 장면인데도 여러 번 돌려보게 된다.
베를린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상임지휘자인 리디아 타르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매력, 지성미가 케이트 블란쳇의 눈부신 연기를 통해 현실적 인물처럼 현현(顯現)하기 때문이다. 케이트의 오랜 팬들은 <블루재스민>과<타르>, 두 편의 ‘케이트 영화’(우디알렌이나토 드 필드의 영화가 아니라) 중에서 어떤 것을 최고작이라 꼽을지 고심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를 통해 마침내 케이트가 메릴 스트립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타르>는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 가득한 지적인 영화인 동시에, 모든 인간관계를 오직 ‘거래’로 보는 자들 사이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정치 영화이며, 클래식음악 업계의 핵심을 정확히 취재한 직업영화이다.
리디아 타르는 <파밸스만>의 주인공처럼 자기자신을 ‘통제하는사람’으로 정의한다. 감독은 시간의 예술인 영화를 통제하고, 지휘자 없이는 연주가 시작되지 않는다. 이들은 시간과 삶과 예술을 콘트롤하는데 성공한 드문 인간들이지만 그 대가는 크고 잔인하다.
〈더 웨일〉,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친절함이다
타르와 교항악단 단원들, 엘비스와 서커스단원들은 세상을 떠돌고, 파벨만 가족들도 동부에서 서부로 대이동을 한다. 하지만 <더 웨일>의 주인공 찰리는 은둔자이다. 그는 8년째 집밖으로 나가지않았다. 또한, 앞의 세 주인공들이 삶과 예술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도전자들이라면 찰리는 자신과 자신의 육체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한 사람이다.
피자와 프라이드 치킨, 초콜릿을 폭식하여 2백킬로가 넘는 ‘고래’(뚱보라는 뜻)가 되었으며 혈압은 238/134. 간호사는 그가 즉시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다면 1주일 안에 사망할거라고 경고를 한다. 간호사의 경고를 그리스의 비극적인 예언으로 설정한 감독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하루 캘린더를 넘기는 방식으로 이 밀실 영화를 시작한다. 찰리는 화상으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대학강사이지만 컴퓨터 카메라가 고장났다고 둘러대며 자신의 외양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지 않 는다. 하지만 이 영화가 놀라운 것은 찰리가 실은 얼마나 우아하고 고결하고 친절한 인간인가를 설득하는데 성공한다는 점이다. (멜빌의 <모비딕>휘트먼의 <풀잎>이 중요 캐릭터들을 감싸는배경이 된다.) 대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은 <블랙 스완><레퀴엠>등을 통해 불안과 자기혐오, 망상에 처박힌 주인공들이 마침내 어둠의 골짜기에서 빠져나와 신적인 초월의 경지로 나아가는 여정을 그려내는데 탁월한 실력을 보여 준 바 있다. 그리고 그 몰입의 연기를 해낸 아르노프스키의 배우들은 예외 없이 생애 최고의 연기상을 가져간다. <더 웨일>의 찰리 역을 맡은 브랜든 프레이저 역시 오랜 침체기에서 벗어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브랜든의 부활, 브레네상스(Brenaissance)라는 신조어를 유행시켰다.
글
김현숙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