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분노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분노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진영·지역·세대·젠 더 등이 대립하고 증오하는 분노다. 임진왜란 시기 기성사림 과 신진사림,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등이 대립하고 분열하던 모습과 판박이다. 그러나 분노하는 사회는 위기의 사회다. 임진왜란도 분노의 전쟁이었다.
일본의 침략에 선조실록에서 보는 선조의 논죄다. “이순신이 조정을 속인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원균)의 공을 가 로채고 남(원균)을 모함하여 죄에 빠뜨렸으니 한없이 방자하 고 거리낌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용 서할 수 없으니 율(律)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은 정반대다.
오히려 이순신의 공을 가로채려 했고 이순신을 모함한 이는 원균이었다. 실체적 진실의 인지 왜곡이었고 판단 오류였음 을 선조수정실록이 말해준다. “순신(舜臣)은 성품이 곧고 굳 세어 조정안에서 대부분 순신을 미워하고 균(均)을 칭찬했으 므로 명실(名實)이 도치됐다.”
분노의 굴레에 묶인 선조,
백성은 누굴 믿고 살라는 말입니까?
임진년(1592) 4월 30일 새벽 선조가 인정전을 빠져나갔다. 임금의 피난길엔 온종일 비가 내렸다. 임금이 먼저 백성을 버 리니 백성도 임금을 버렸다. 궁성으로 몰려간 백성이 경복궁· 창덕궁·창경궁에 불을 지르니 세 궁궐이 일시에 타버렸다. 평 양성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임금의 가마가 성을 나가지 못 하도록 백성이 몽둥이로 궁비를 쳐 말 아래 떨어뜨렸다. 아무 리 몽진(蒙塵)이 고육지계라 해도 백성은 분노했다. 류성룡 의 징비록이다. “임금의 가마가 마산역(파주 광탄)을 지날 때 밭 가운데 농부가 울부짖었다. 나라가 우리를 버리니 백성은 누굴 믿고 살라는 말입니까”
선조가 조정을 반으로 나눴다. 분조(分朝)였다. 임금은 명나 라로 내부(內附, 망명)할 테니 세자는 남아서 나라를 지키라 는 것이었다. 아비는 살길 찾아 북으로 떠나며 18살 자식은 사지로 내몰았다. 백성의 민심이 세자 광해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육지의 장수는 연전연패했고 바다의 장수 이순신은 연전연 승했다. 그러니 이순신에게 가면 산다! 라며 백성이 모여들었다. 선묘중흥지다. “장사들이 다시금 구름같이 모여들고 남쪽 의 백성들이 이고 지고 찾아 들어와 (고금도)진영의 웅장함이 한산도의 열 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선조는 툭하면 왕위를 넘기겠다며 선위(禪位) 소동을 벌였다. 세자 광해를 견제함 이었다. 치열한 전쟁 중에 최고 지휘관 통제사를 교체했다. 이 순신을 경계함이었다. 임금의 불신과 분노는 나라의 재앙이 었다. 리더가 분노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다.
분노의 사슬에 묶인 원균,
그 죄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일본군이 침략해오자 원균은 스스로 군영을 불태웠다. 수많 은 군선과 군사가 수장되고 실종됐다. 비록 청야(淸野)전술 이라 해도 결정적 실책이었다. 임진년 연합작전에서 이순신 의 전과에 뒤지고 군공에 밀린 이유였고, 계사년(1593) 신설 된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지 못한 이유였다. 대선배 원균이 새카만 후배 이순신의 차장(次將)이 된 건 참을 수 없는 수치 였다. 사관의 기록이다. “원균이 이순신의 차장이 된 점을 부 끄럽게 여기고 절제를 받지 않으니 이순신은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사면(辭免)을 청했고, 조정에서는 누차 도원수에게 공 죄(功罪)를 조사하게 했는데 원균은 더욱 거침없이 욕지거 리를 내뱉어 하는 말이 모두 추악했다.”
갑오년(1594) 원균은 결국 충청 병마사로 체직됐다. 통제사 탈 락에 이은 설상가상의 분노였다. 그런데도 정유년(1597) 2월 원균이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5개월 후 칠천량에서 참패했다. 수군의 궤멸이었고 호남의 함락이 었다. 비변사가 책임을 물어 원균을 징계할 때, 사관의 서릿발 같은 직필에 등골이 서늘하다. “사신은 논한다. 한산(칠천량)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 (磔刑, 죄인을 기둥에 묶어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 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 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 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돼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 져야 할 것인가. 한산(칠천량)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 이 함몰됐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돼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 으려 한다.” 분노한 임금 선조의 오판과 도원수 권율의 곤장 등 분노의 사슬에 묶인 원균의 무모한 출동이 부른 결과였다. 리더의 절 제되지 않은 분노는 나라의 함몰이었다.
버럭 화부터 낸다면
고작 자신을 해칠 뿐이다.
이순신이 정유년 옥중에 갇혔을 때다. 친지가 와서 “위에서 극도로 진노하시고 또 조정의 여론도 엄중하여 사태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하니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요. 죽게 되면 죽는 것이요.” 했다. 이순신이 옥문 을 나와 백의종군할 때의 난중일기다 “원균이 온갖 계략을 꾸 며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나를 헐뜯는 것이 날로 심하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이 순신은 임금이 자신을 죽이려 해도, 원균이 자신을 헐뜯고 모 함해도 ‘내 운명이요! 내 운수로다!’ 했다. 자신을 성찰하고 자 신이 수용하는 분노의 절제였다. 역사는 무섭게 분노했던 선 조를 무책임한 국왕으로, 사납게 분노했던 원균을 무능한 패 장으로, 분노를 절제했던 이순신을 구국의 명장으로 평가한 다.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의 인물이 바로 이순 신인 이유다.
임진왜란 그 분노의 시대, 이순신의 분노 절제는 그가 배운 소학(小學)에 있었다. “관직에 있는 자는 먼저 사납게 성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일에 옳지 않음이 있으면 마땅히 자세 히 살펴서 처리해야 한다. 그리하면 반드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만약 버럭 화부터 낸다면 고작 자신을 해 칠 뿐이다. 어찌 능히 남을 해치겠는가(若先暴怒 只能自害 豈能害人)”
오늘날 우리네 가슴마다 뭉쳐 있는 분노의 응어리, 사회적 양 극화로 인한 극도의 증오와 분노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인지치료 전문가 유팬(Upenn) 의대 석좌교수 아론 벡(Aaron T. Beck)의 진단이다. “증오의 뿌리는 자기중심적 선입견 에서 오고, 인지적 오류는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온다. 굳게 닫 힌 마음을 열고 함께 소통하고 바꾸어 생각하면, 갈등·증오· 분노·보복 악순환의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다.”
『분노의 시대, 이순신이 답하다』
『위기의 시대, 이순신이 답하다』
『역사 속의 이순신, 역사 밖의 이순신』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