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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극의 종주국은 미국이다. 세르지오 레오네 같은 유럽 감독이 유럽식으로 해석한 웨스턴도 있었고, 러시아가 만든 동양식 서부극(오스턴 또는 레드 웨스턴)도 있었지만 모두 한때 반짝였을 뿐이다. 개척자 정신과 아메리칸 드림으로 무장한 상남자들의 세계를 그리는 웨스턴은 미국 영화역사의 가장 중요한 장르이다. 1902년 <대열차 강도>이후 서부극은 고전 헐리우드의 영화문법을 정리했고 그 5형식은 지금도 <스타워즈>나 <매드맥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등 소위 뉴웨스턴, 모던 웨스턴에 영향을 주고 있다.
서부극은 시대정신이 바뀌면서 반성과 수정을 거치고 진화한다. 웨스턴의 위기 때마다 구원투수가 나타났으니 영화에선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코엔 형제, 문학에선 코맥 매카시가 그들이었다. 지금 미국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 웨스턴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여자 감독들, 외국인 감독들이다.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웨스턴이 100여 년 동안 웨스턴의 변방에 있던 이들에 의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슬로우 웨스턴
First Cow, 캘리라이카트,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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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부극이 다시 돌아온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서부극을 다시 본다는 것은 서부를 다시 본다는 것이고 이는 미국을 처음부터 다시 본다는 뜻이다. 신대륙의 동쪽에 당도한 선조들이 서진하면서 꿨던 꿈에 대해서 생각하고, 오늘날 미국이 그들이 노래했던 기회의 땅, 자본주의의 이상이 실천되는 곳인가 반문한다. 서부극의 컨벤션에서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여타의 웨스턴이 남북전쟁 이후를 다루는데 반해 이 영화가 1820년대 오리건을 다루는 것은 이곳이 아직 미국이 시작되기 전의 미국이기때문이다.
크게 한탕하고 싶은 남자들이 모여드는 서부에서 두 남자가 만난 다. 유대인 출신으로 동부에서 이곳까지 떠돌다 당도한 쿠키는 다른 서부의 사나이들과는 결이 다르다. 성격도 유순하고 오직 잘 하는건 음식 만들기이다. 또 다른 남자는 세상의 이곳 저곳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다녀온 떠돌이 중국인 킹루이다. 왕따에 아웃사이더인건 쿠키와 마찬가지이지만 나름 결기도 있고 사업 수완이 좋다.
러시아 출신 악질 사냥꾼들에게 쫓기던 킹루를 구해준 쿠키는 루와 의기투합해 밀가루 케익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다. 문제는 우유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오레곤에는 젖소가 딱 한 마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레곤의 실력자이자 비버 무역상인 팩터가 소유한 젖소에게 몰래 다가가 우유를 훔쳐 케익을 만들지만 결국엔 들키고, 이때부터 목숨을 건 추격전이 벌어진다.
이 영화는 미국의 여성감독 켈리라이카트의 작품으로서 전 세계 미디어 대부분이 ‘올해 최고의 영화’로 선정했다. 우정이라는 큰 주제를 켈리 특유의 느린 리듬과 사소함으로 표현한 걸작이다.
존 포드는 “서부극의 가장 큰 주역은 풍경”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 영화 역시 공간이 이야기를 하도록 한다. 감정이 풍경을 반영하거나 풍경이 감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컬럼비아 강에 배 한척이 지나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지나가는 현대식 배를 정지된 카메라가 지켜보는데 이는 영화의 끝에 “고 피터 휴튼에게 바친다”는 헌사와 이어진다. 피터 휴튼은 풍경 영화의 대가이자 슬로우 무비의 철학자로 불리던 감독이다.
어떤 큰 사건도 몰고 오지 않을 인물들을 무심히 뒤따라가거나 클로즈업할 때 생겨나는 리듬을 즐기고, 제시된 산천초목과 풍경을 음미하는 것이 <퍼스트 카우>를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이다. 타성화된 웨스턴이 아니라 정말 새로운 웨스턴을 만나게될 것이다.
<퍼스트 카우>는 미국 서부에 당도한 첫 번째 암소이다. 작은 배에 실려서 컬럼비아 강가에 도착한 암소는 멀고 먼 여행길에서 남편과 새끼를 잃었다. 이 소는 두 주인공처럼 유순하고 무해한 서부의 일원이 됐다. 총을 드는 대신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존재들이다. 또한 밀가루 과자에 우유를 첨가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초기 자본주의의 면모를 보여 준다는면에서 이 영화의 정치적 의도를 알게해 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안티 웨스턴 <파워 오브 도그>
The Power of the Dog, 제인캠피온,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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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몬태나. <퍼스트 카우>에서 설정한 연도(1820년)보다 약 100년 후이다. 필과 조지형제는 수십 명의 카우보이를 거느린 대목장주이다. 아직 미혼인 두 형제는 모두 대학까지 나온 지식인이다. 특히 형인 필은 예일대에서 고전을 전공한 보기 드문 동네 천재에다 라틴어와 악기(우크렐레)도 능숙하다. 자신과 동생을 로마 건국신화의 주역인 로물루스형제에 비견하면서, 25년 전 형제에게 목장일과 사나이다움에 대한 모든것을 가르쳐줬던 프랑코헨리라는 카우보이를 우상화한다. 40세가 되도록 여자와 사귀어본 적 없이, 카우보이들과 젖소와 말들 사이에서 살아온 두 형제는 대저택에 살면서도 작은 침실을 공유하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잔다.
유순하고 점잖은 신사 조지가 형에게 한마디 언질도 없이 동네의 아름다운 과부 로즈와 결혼하면서 영화는 제 2막을 전개시킨다. 필은 자신의 낙원에 들어온 로즈를 용납하지 않는다. 암묵적이고 정신적인 학대에 시달리는 로즈와 필의 악마적인 괴롭힘이 2부에 이어지는데, 마치 에드가 알란 포의 <어셔가의 몰락>을 연상시키는 대저택의 실내 연출이 돋보인다. 1,2부에서 복선처럼 갈무리해뒀던 피터(로즈의 아들)가 필과 동상이몽의 계획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 클라이막스이다.
그리고는 아무리 영화보기에 훈련이 잘 돼 있는 관객들도 예측하기 힘든 엔딩이 기다리고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부지런히 생각하고 복기하면 마침내 도달하는 곳은 영화의 첫 대사(피터의 나레이션)이다.
 
“엄마를 도울 수 없다면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이란 말인가?”

 

칸 영화제 사상 처음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뉴질랜드 여성감독, 제인 캠피온은 ‘원작소설에 사로잡힌채 각색했다’고 말한바 있다. 토마스 새비지의 <파워 오브 도그>는 실제로 작가가 재혼하는 엄마를 따라 몬태나의 목장에 이주하면서 만났던 큰아버지 캐릭터를 회고하며 쓴 자전적 소설이다. 악의와 냉소, 근육질의 서부사나이 필은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무시무시한 주인공 대니얼 플레인뷰를 떠올리게하는 냉혹한 인간이다(두 영화의 음악을 모두 ‘천재’라고 불리는 조니 그린우드가 맡아했기에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서부극의 한 특성인 ‘마초적인 남성’에 대한 보고서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유해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에 대한 사례연구라고 할까? ‘남자 답다’, ‘남자다워야 한다’는 사회적 억압이 어마무시하게 작용하는 시공간(1920년대, 몬태나, 카우보이의 세계)의 남자들. 제목이 상징하는 바,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개의 실체를 제대로 본 사람은 프랑코 헨리나 필, 피터가 아니라 제인 캠피언이라는 이국의 여성감독이다.
영국인 중에서도 상위 1%만 쓴다는 포시 잉글리시(Posh English: 영국 상류층 언어)를 구사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완벽한 몬태나 액센트의 카우보이로 변신해 2022년 아카데미에서 주연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스파이더맨>의 첫사랑 메리제인으로 각인된 커스틴 던스트도 필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로즈 역을 맡아 사실 그가 얼마나 좋은 연기자였던가를 환기시켜준다.

 

미니멀리즘 웨스턴 <올드 헨리>
Old Henry, 팟시폰치롤리, 2021년
신화나 전설이 없는 미국에서 역할 대행을 하는 것은 서부개척시대의 아이코닉한 영웅들이다. 실존 인물인 와이어트 어프, 빌리 더 키드, 닥 할리데이의 스토리가 끊임없이 재가공되고 리메이크되는 이유이다. 수정주의 서부극이 좋아하는 스토리는, 전설적인 총잡이들 이 과거의 폭력과 무차별적인 살인에 대한 죄책감, 회한에 시달리다가 모종의 결단을 하고 마침내 구원받거나 갱생한다는 이야기이다. <올드 헨리>는 <수색자>와 같은 고전웨스턴의 향취와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제임스 암살>, <용서받지 못한 자>의 인디 버전의 총화라고 불릴 만큼 우아하면서 미니멀하다.
어둡고 비밀스런 과거를 가졌지만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농부가 있다. 그는 뉴욕에서 태어나 15살에 고아가 됐으나 어머니의 원수를 사적으로 응징한 후 현상수배범이 되어 뉴멕시코 일대를 떠돌았다. 소년의 옛친구이자 숙적인 보안관 개럿에게 사살된 후 20년이 흘렀다. 1906년 오클라호마. 인적이 거의 없는 영토이다. 정통 서부극이 즐겨 펼쳐보였던, 가로로 긴 화면에는 전형적인 서부의 풍경화가 있다. 도시의 총잡이에 대한 선망이 있는 10대 아들과, 육체노동과 성경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늙은 아버지를 대지에 붙들어두는 것은 집 가까이 묻혀있는 아내이자 엄마의 무덤이다.
안장만 얹혀있는 임자 없는 말이 나타나고, 농부가 부상당한 말 주인과 돈 가방을 발견하면서 웨스턴에서 예상하는 모든 일이 순차적으로 일어난다. 3명의 보안관(보안관을 사칭한 살인자들)이 난입해 범인과 돈 가방을 요구하면서 피할 수 없는 일전이 기다린다. 20년 간 감춰 뒀던 총을 꺼내든 농부에게 적장이 이름을 묻는다. 헨리 맥아티. 서부극 팬이라면 단박에 그가 누구인가 안다. 헨리 맥아티 또는 윌리엄 보니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으나 빌리 더 키드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신비스러운 건 맨.
이 영화는 올해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됐다. 영화제 영화로는 드물게 평론가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들에게도 크게 환영받았다. 서부극을 서부극답게 끌어올리는 긴장감이 엄청나며 특히나 헨리 역을 맡은 팀 블레이크 넬슨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농부에서 건 맨으로 변신 하는 과정이 너무나 교묘하고,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동물적 눈매, 넬슨 특유의 남부 액센트는 이 영화를 향후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게 될 것이다.
 
사족: 빌리 더 키드를 쏘아죽일 때 개럿이 사용했던 권총(콜트 싱글액션 리볼버)이작년 8월, 미본햄스 경매에서 약 80억원에 낙찰됐다.
 
글 김현숙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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