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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유목일지 

 

고미숙

고전평론가

 

 

 

1780년, 부도 명예도 없이 울울하게 40대 중반을 통과하고 있던 연암 박지원에게 중원대륙을 유람할 기회가 다가왔다.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 사절로 가게 되면서 개인수행원 자격으로 연암을 동반하기로 한 것이다. 5월에 길을 떠나 10월에 돌아오는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이 여행의 기록이 바로『 열하일기』다. 조선왕조 오백년을 통틀어 단 하나의 텍스트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열하일기』를 들 것이다. 또 동서고금의 여행기 가운데 오직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또한 『열하일기』를 들 것이다. 『열하일기』는 이국적 풍물과 모험을 지리하게 나열하는, 흔해 빠진 여행기가 아니다. 그것은 낯설고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강렬한‘접속’이고, 침묵하고 있던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발견’의 현장이며,새로운 담론이 펼쳐지는 ‘생성’의 장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열하일기』를 통해 아주 낯설고 새로운 여행의 배치를 만나게 된다.

 

여행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됐다. 애초의 목적지는 연경(북경). 압록강에서 연경까지의 거리는 약 2천 3백 여리. 길이도 길이거니와 가이없이 펼쳐지는 중원의 변화무쌍한 기상이변은 실로 만만치 않았다.찌는 듯한 무더위,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폭우, 집채만한 파도 등을 무시로 겪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을 건너 요동으로, 요동벌판을 지나 성경(지금의 심양)으로, 다시 산해관에 이르는 여정은 스릴과 서스펜스 넘치는 모험의 연속이었다. 특히 연암은 비대한 몸집에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체질이라 그 괴로움은 몇 배 더했다. 중국인 뱃사공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너는가 하면, 강 한가운데 있는 모래톱에 갇히기도 하고, 심하게는 하루에 일고여덟 번씩 강을 건너며 생사를 넘나드는 아찔한 순간들을 겪기도 했다. 그렇다고 쉴 수도 없었다. 만수절에 맞춰 연경에 도달하기엔 날짜가 빠듯했기 때문이다. 쉴 참을 뛰어가며 쉴 새 없이 달리니 말들은 더위에 쓰러지고 일행은 모두 더위를 먹어 토하고 싸면서 마침내 연경에 도착했다. 그러나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열하에 있는 피서산장에 가 있었던 것. 연경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일이 벌어진다. 깊은 밤 발자국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오더니 열하로 떠나라는 전갈이 당도한 것이다. 황제가 조선사신단 일행을 당장 열하로 불러들이라고 닦달을 한것이다. 통관을 비롯한 사행단원들은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고 난리다. 겨우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저 아득한 북쪽 땅 열하까지 가야 하다니.

연경에서 열하까지는 다시 700리. 길은 멀고 일정은 빠듯한지라 인원을 최소한으로 제한해야 했다. 연암은 비공식수행원이라 가지 않아도 무방한 처지, 그래서 잠시 머뭇거린다. 조선인으로선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 저 아득한 요해의 땅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연경에 남아 이국의 선비들과 지식을 교류할 것인가. 시야를 넓히라는 팔촌 삼종형 설득에 마침내 열하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 순간은 실로 연암의 생애, 아니 18세기 지성사에 있어 한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연암이열하라는 낯설고 이질적인 공간과 만나지 않았다면, 이 여행기는 당대널리 유행한 <연행록> 시리즈의 하나가 되고 말았을 터이므로.

굶주림과 ‘잠고문’ 속에서 연암 일행은 마침내 열하에 도착했다. 열하는 당시 북방의 오랑캐들을 제어할 수 있는 ‘천하의 두뇌’에 해당하는곳이었다. 황제의 열하행은 애초 ‘두뇌를 누르고 앉아 몽고의 목구멍을틀어막자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해마다 열하의 성지와 궁전이 날로 늘어 그 화려하고 웅장함이 연경보다 더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당시 열하는 천하의 중심지에 해당했던 셈. 명성에 걸맞게 열하는 과연 열광의 도가니였다. 연암은 이곳에서 온갖 진기한 인간군상, 기이한 동물, 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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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북경사행로 : 서울을 출발해 의주를 거쳐 북경을 오가던 조선 사신의 여정을 담은 지도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위구르, 티베트 등 이국의 낯선 문화들과 마주친다. 연암은 이 이질성의 도가니를 종횡무진 누빈다.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그토록 열망했던 중국선비들과의 ‘고담준론(高談峻論)’도 여기서 이루어진다.

연암의 목적은 관광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저기를 떠도는 유랑이나 편력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끊임없이넘나들면서, ‘사이’에서 사유하기를 시도한다. 그런 까닭에, 사신을 비롯해구종배1)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되놈의 나라’라서 산천이며 누대조차 노린내가 난다고 눈도 주지 않은 채 오직 목적지만을 향해 나아가는 집합적 배치 속에서 연암은 끊임없이 옆으로 ‘샌다.’ 중원천지의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 ‘사이’를 가로지르기 위해서. 그는 마주치는 모든 것들과 접속을 시도한다. 길거리나 주막에서 만난 여인네나 어린아이건 신이한 동물들이건, 아니면 벽돌과 수레, 온돌 등 ‘이용후생’과 관련된 제도들이건. 그의 시선이미치지 못하는 곳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그의 가장 큰 목적은 이국의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장사치들과 사귀기 위해 매일 밤 ‘야음을 틈타’ 잠행을 시도한다. 역관을 빠져나가기 위해 거짓말과 능청부리기, 온갖 술수(?)를 다 구사한다. 연암은 중국말을 할 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중국친구들을 사귄단 말인가? 필담을 통해서다. 그리고 따뜻한 시선과 웃음, 활발한 몸짓. 예나 이제나 친구를 사귀는데 이보다더 기막힌 무기는 없는 법이다. 단 며칠만의 만남만으로도 장사꾼들은 연암의 박학과 인품에 매료된다. 연암은 그들의 외모와 지적 수준, 인생편력,그리고 동작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포착해낸다. 연암과 이들이 나눈 우정은 그 자체로 중국의 ‘인정물태(人情物態)’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다.

열하에선 한족 출신의 재야선비들과 본격적으로 ‘접선’을 시도한다. 당시는 만주족 출신이 지배하던 시절이라 사회 전체에 한족과 만주족 사이의팽팽한 갈등이 만연해 있었다. 연암은 이들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다양한전략을 구사한다. 물론 주로 유머를 통해서. 중국선비들은 언뜻언뜻 속내를 보이고는 필담한 종이를 곧바로 불에 태우거나 먹어치우거나 찢어버린다. 팽팽한 긴장이 넘치는 필담이 엿새 동안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천하의 형세를 비롯해 주자학과 불교의 관계, 지전설2)과 지동설, 서양, 천주교 등 당대 지성사의 첨예한 이슈들이 총망라된다. 일종의 거대한 ‘문명론'이 구성되는 순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듯 연암에게 있어 삶과 여행은 분리되지 않았다. 삶은 곧 길이었고,길은 곧 글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길 위에서 사유하고, 사유하면서 길을떠나는 ‘노마드’였던 것. 세상 어떤 것들과도 접속할 수 있지만, 그 어떤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이질적인 것들 사이를 유쾌하게 가로지르면서 항상 예기치 않은 창조적 선분들을 창안해내는 존재, 노마드(유목민). 『열하일기』가 18세기의 텍스트에 갇히지 않고 시공을 가로질러 21세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도 삶과 우주에 대한 드넓은 비전을 제시해주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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