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선농문화포럼

화제의 인물

조회 수 28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page10.jpg

 

page11.jpg

근래에 들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등 한·중·일 3국간에 영토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단국가가 된 이후 중국과 우리 민족과의 가장 중대한 간도문제는 거론되는 일이 없다.

간도는 중국 동북부의 한국인 거주지역으로서 넓게는 길림성(吉林省)을 중심으로 랴오닝성(遼寧省)을 포함한 장백산맥(長白山脈) 일대의 서간도와 두만강 북부의 북간도(혹은 동간도)를 함께 지칭하며, 좁게는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가 있는 북간도만을 말한다. 간도라는 지명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지역이란 뜻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1437년(세종 19)에 설치했던 6진(六鎭)으로 백두산과 그 동서의 두만강?압록강이 우리나라의 국경선이 되었으며 1674년(현종 15)에 이곳에 무산진을 설치하여 두만강 내 지역 전부를 조선의 영역으로 확정했다.

이로써 조선과 청과의 국경은 압록·두만의 두 강으로써 이루어졌으나 그 원류인 백두산 근처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고 두강 상류의 북안은 일종의 공백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1677년(숙종 3)에 청의 강희제(康熙帝)가 장백산, 즉 백두산을 그 조상의 발상지로서 관심을 갖고 내대신(內大臣) 무묵납(武默納)에게 명하여 장백산 지방을 답사시키고 다음해에 신하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다시 6년 후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청의 태도는 조선 정부를 자극했다. 인삼·모피·진주 등 특산의 보고(寶庫)였던 이 지역은 조선 사람들도 두만강을 넘어 농토를 개간하던 지역이었던 것이다. 1712년 양국 대표가 만나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 지점에 세운 이 비석은 높이 2.55척, 너비 1.83척이며 비면에 ‘大淸’이라 새기고 그 아래에 “烏喇摠官穆克登奉旨査邊至比審視西爲鴨綠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라고 조선의 군관·차사관·통관의 성명도 각각 새겨 넣었다.

 

이후 간도 지역에 변발과 호복(胡服)을 마다하며 사는 조선족이 10여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청은 이들에게 귀화를 하든지 아니면 두만강 너머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조선 정부는 종성 사람 김우식을 시켜서 백두산을 답사하게 하여 정계비를 찾아내 이 비에 명시된 토문강(土們江)은 북류하여 송화강에 이르는 것으로서 토문강 밖의 유민은 철수하되 도문강(두만강)밖 즉 간도 땅의 거주자는 조선영토인 만큼 철수할 이유가 없다는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청측은 토문을 두만강이라 하며 간도일대를 청나라의 땅이라 주장했다.

 

이에 1885년 조선과 청은 다시 협상을 하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당시 안변부사였던 이중하(李重夏:1846~1917)를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로 임명해 청과의 협상에 나서게 했다. 그는 청나라와 2차례 국경회담 즉 1885년 을유감계와 1887년 정해감계 회담에서 조선 대표로 활약했다.

 

이때 이중하는 “차라리 내목을 쳐라! 그러나 국경선은 결코 축소할 수 없노라(吾頭可斷 國疆不可縮)”고 강하게 주장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이같은 이중하의 단호한 대처로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 1909년 일본은 청과의 간도협약을 통해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에 넘겨버렸다. 이는 당사자인 조선이 참여하지 않은 불법이며 따라서 간도 문제는 아직까지 해결이 안 된 채 남아있는 것이다.

 

간도를 배경으로 한 토지의 작가 고 박경리는 “이미 나라의 지배 밖으로 떠난 유민들의 터전을 지켜 주기 위하여 목을 내걸고 항쟁한 이중하”를 ‘의인(義人)’이라고 칭하고 있다.

 

또 경인교대 강석화 교수는 “국가간의 국경회담에서 일단 영토에 관해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게 이중하의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하면서 “이 분이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영토문제에 관한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한 이때의 회담 덕택으로 간도의 영토문제가 아직도 분쟁지역으로 유효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글 허정균

前 한겨레신문 기자


  1. 윤석남의 페미니즘 미술 엿보기

    “그 동안 회고전을 하자는 제안을 여러 번 받았지만 다 사양했어요. 내가 그런걸 해야 할 정도로 늙었나? 난 아직도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미루고 미루다 이번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처음 회고전을 하는데, 말이 회고...
    Date2016.04.11 Views350
    Read More
  2.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여명학교 ‘조명숙 교감’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여명학교 ‘조명숙 교감’ 글 정하영 (한국철강신문 편집국장) 일상이 참으로 팍팍한 세상이다. 일신을 위해 살다보니, 아니 욕심내다보니 모두 여유가 없다. 이타는커녕 주변을 돌아보고 챙겨볼 엄두를 내기도 쉽지 않다. 그...
    Date2016.04.11 Views5288
    Read More
  3. 중국의 문화코드 - 장공자

    현대중국의 대표적인 석학 린위탕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문자와 만리장성 그리고 멘즈(체면)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이 세 가지는 유형과 무형의 중국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
    Date2016.04.11 Views266
    Read More
  4. ‘간도’땅을 지킨 이중하를 아시나요 - 허정균

    근래에 들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등 한·중·일 3국간에 영토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단국가가 된 이후 중국과 우리 민족과의 가장 중대한 간도문제는 거론되는 일이 없다. 간도는 중국 동북부의 한국...
    Date2016.04.11 Views281
    Read More
  5. 비판의 시선으로 보는 한국사 - 남경태

    강국의 조건이라면 보통 땅과 사람을 꼽는다. 그러나 실은 그 두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게 역사다. 땅이 좁고 사람이 적어도 강국인 나라가 있고, 반대로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도 강국이 되지 못하는 나라가 있다. 그렇게 보면 한국이 강국의 조건에서 가장 자...
    Date2016.04.11 Views165
    Read More
  6. 작은 달력 속의 큰 역사 - 남경태

    작은 달력 속의큰 역사 글 남경태 (인문교양서 저술가) 12월 31일과 1월 1일은 하루 차이지만 그냥 하루가 아니다. 달력의 한 장을 넘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낡은 달력을 버리고 새 달력을 벽에 거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위적인 시간의 개념에...
    Date2016.04.11 Views295
    Read More
  7. 미지에의 도전 - 주돈식

    우리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 조상들이 너무 안이하게 살았다는 데에 화가 난다. 여기엔 큰 두 가지 사실을 상기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 첫째는 오끼나와섬 문제다. 지금은 오끼나와로 불리며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일본의 중요한 전략 포인트가 되어 있지만,...
    Date2016.04.11 Views74
    Read More
  8. 혁명이 없었던 역사 - 남경태

    혁명이 없었던 역사 서양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와 안정된 사회를 이루었던 동양사회! 이것이 세계 문명의 선두주자로 군림했던 이유이자 그 자리를 서양에 내주게 된 이유다. 글 남경태 (인문교양서 저술가)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어릴 ...
    Date2016.05.02 Views115
    Read More
  9.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날, 마지막 어전회의 - 김무일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날, 마지막 어전회의 글 김무일 前 현대제철 부회장 선농문화포럼 이사 숱한 외적의 침입과 전란을 겪으면서도 500여년을 맥맥히 이어온 제국의 운명이,하루아침에 역사의 뒤안길로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1975년 4월 30...
    Date2016.05.02 Views506
    Read More
  10. 역사가 바뀔 수 있나? - 이종욱

    역사가 바뀔 수 있나? 글 이종욱 (서강대학교 총장) 역사학자들은 진리만을 이야기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660년 백제를 정복한 신라의 왕 김춘추 (생존기간 603~661, 왕위재위기간 654~661)에 대한 역사가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
    Date2016.05.02 Views209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Nex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