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더니…
박기남
사대부고 14회 졸업
덕영산업(주) 대표

덕수궁에서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시회를 보며 그곳에서 어머니를 다시 만나 뵈었다. 아버지는 석유협회 회장도 여러 번 하셨고 어머니와의 인연으로 손정순 교장선생님이 계실 때 사대부고 사친 회장도 하시면서 사업도 크게 하신분이셨는데 시간이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져가고 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지 20년이 되는 2024년 전시회에서 어머니의 작품을 보면서 예술은 생명이 길구나라고 느낀다. 어머니는 한때 수녀가 되려고 하셨다. 외할아버지께서 “여자가 무슨 공부냐”라며 시집이나 가라고 만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다피시 해 일본유학을 하셨다. 그런 연유로 이미 혼기를 놓치게 됐다. 당시 여자들은 대게 20대 초반이면 결혼하던 때라 서른살 나이에는 남의 첩이나 되는 처지가 다반사였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그럴 바에야 수녀가 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결혼식 날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어머니는 대만에서 백합꽃을 공수해 오실 정도로 예술 감각이 뛰어난 분 이셨고 또 예술을 중요하게 여기셨던 분이셨다. 어머니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의 조카이고 우리 딸은 지금 뉴욕에서 디자이너로 일을 하고 있으니 유전적 소질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80여 년 전 30대에 첫아이를 낳았다면 요즘의 기준으로는 50대에 출산한 만큼이나 드문 일이었다. 그런 축복 속에서 나는 첫아들로 태어나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살았다. 외할아버지가 거금을 들여서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언제나 다시 일어나라고 내 이름을 일어날起자와 사내男 - 기남이라고 지어 주셨다. 그 시절에는 자식들을 비교적 잘사는 서울에 있는 친척들에게 보내 학교를 다니게 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아버지 고향인 원주에서 올라온 사촌형들이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고 그 외에도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차훈도할머니 등 우리 집은 마치 양로원 같았다. 6.25사변 때 피란 가서 신세를 졌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모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너무나 많은 군식구들 속에서 어머니는 오붓한 시간을 가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달걀하나를 가지고도 내 자식 먹이고픈 마음에 고민을 하셨을 것이다. 더욱이 마당 옆에는 운전사아저씨 가족과 가사를 도와주는 식모 아주머니도 살고 있었으니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집이었다. 이런 대가족을 모시고 살면서도 어머니는 자수에 능하셨고 여성단체 협의회 일도 하셨는데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어머니는 제3대 사임당상을 받으셨다. 여성 단체 협의회 그리고 이화여자대학 등의 일에 관여하면서 어머니는 사업자금 조달에도 큰 몫을 하게 됐다. 아버지는 석유사업이 잘됐는데도 고향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원주에 칠공예 주식회사를 세우고 인간문화재 김봉룡 선생을 모셔와 옻칠공예도 하셨다. 석유사업은 단순한 유통과정만 챙기면 되지만 칠공예회사는 지붕에 바르는 폴리칼 등의 제품을 생산하고 치악산 100만여 평에 조림을 하는 회사였다.
사업은 때로는 재물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잔인한 것이어서 情으로 시작한 칠 회사가 원인모를 화재가 두어 번 발생하고 경영난이 겹치면서 문을 닫게 됐다. 이러저러한 일들이 쌓이면서 석유회사도 부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도 어머니는 내게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유학경비를 꼬박 꼬박 보내주셨다. 나는 1972년 귀국해서야 전후 사정을 알게 됐다. 내가 귀국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형무소로 들어가기 위해 한복을 준비하고 계셨다. 사업체가 부도가 나면 사업주는 형무소에 가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회사는 많이 곪아 있었고 경영진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그나마 영어를 할 수 있는 내가 석유공사 수석 부사장이던 맥 월터씨의 집에 찾아가서 기다리다가 신용 한도를 늘려달라고 부탁하면서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마다 현관에서 나를 맞으시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기남아 미안하다” 어느 부모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솟는 혈기에 욱하고는 했다. 지금도 그때 어머니께 죄송합니다를 계속 되뇌곤 한다. 사채는 잠자는 시간에도 늘어났다. 이자가 15%~ 30%로 올라가고 전국적으로도 여러 업체가 부도가 났다. 아버지가 재산을 빼돌린 것도 아니고 친척들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사신 아버지가 교도소에 가야한다니 너무 공평하지 못한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국가전체가 경제적으로 지극히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8.3 사채 동결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놓은 것이다. 그때까지 진 빚을 모두 국가에 신고하게 해서 고금리 이자를 낮추고 원금은 몇 년에 걸쳐서 상환하게 한 극단적인 조치였다. 정부의 8.3조치로 회사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결국 석유공사와 관리계약을 맺어야 했다. 계약과 동시에 석유공사 직원들은 마치 점령군처럼 모든 결정과 집행을 해갔다. 필동의 그 넓은 집도 벤츠 승용차도 누구에게 얼마에 팔렸는지도 모르게 팔려갔다. 그때 어머니가 쓰시던 노트를 보면서 나는 가슴이 아팠다. 거기에는 누구에게 언제 얼마를 빌렸는지가 자세하게 적혀있었다. 어머니는 그 노트를 매일 보시면서 “이 돈을 언제까지 갚아야 하는데” 하셨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어머니는 의연하게 내 결혼식을 준비해 주셨다. 내가 유학한 것도 결혼을 하게 된 것도 모두 어머니의 덕분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보통의 어머니라면 아마도 모든 것을 뒤로 미루자고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큰 파도들을 직접 맞으면서도 큰 사랑을 보여주신 거인이시다. 좋은 부모란 인생에서 커다란 파도가 올 때 그것을 막아주고 그것이 안 되면 같이 파도를 타고 넘는 게 부모이다. 어머니는 정말 그 어려운 고비들을 넘기면서도 잘 버텨내신 큰 거인이시다. 우리는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언제나 부모님에게 의논드렸다. 부모님이 저세상으로 가신 후에는 “이럴 때 부모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행하면 그 순간에는 어려울 것 같다가도 시간이지나면 다 해결이 잘 되고는 하는 경험을 한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성인으로 성장해 갔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희망을 거신 일은 정릉 미아리고개 땅에다 아파트를 지으시려는 계획이었다. 1960년 로마올림픽을 구경하고 오시면서 유럽에서는 아파트라는 건축물이 있다는 것을 아신 것이다. 설계도까지 다 완성하고 공사에 착수하려는 때 북한에서 김신조 특공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부터 그 근처 지역에는 건물을 못 짓게 됐다. 아무리 자기가 최선을 다해도 모든 일은 시대 상황과 시간에 좌우되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어느 정도는 미리 정해진 부분이 있나보다. 전생이란 것도 있나 보다. 어린 꼬마들이 그 나이에 트로트를 그렇게 잘 부르는 것도 전생에 노래를 해왔으니 까 그렇겠지. 크게 보면 선도 악도 없다고 하지. 매일 맑은 날만 계속되면 좋지만 그렇다면 그 땅은 사막이 되어버리고 말지 않을까? 내 사업이 잘 되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바이어도 찾아다니고 할 때 어머니도 공부하시던 동경에 한 번 가시고 싶어 하셨는데 그 때는 이미 나이가 드셔서 그 소원을 못 이뤄 드린 게 마음 아프다.
우리는 꿈속에 사는가보다. 내가 몇 년 전에 매도한 반포 아파트는 가격이 7억이었는데 그것이 지금은 30억 원이 넘는다니..... 아버님이 그렇게 바라시던 정릉 미아리고개 아파트를 지으시려던 꿈이 지금은 그대로 아파트 숲이 되었으니..... 전라도에서는 국회의원과 시의원의 100%가 다 야당이라니..... 북한은 그런 독재정치가 80년을 넘게 지속 할 수 있다니.....

아내는 제2의 어머니라니 내가 정성껏 올바르게 살아가면 어머니 같은 아내를 가질 수 있을까? Kalamazoo Michi-gan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나의 로고와 사인을 자수로 만들어주셨다. 어머니가 뵙고 싶을 때 그 사인을 보며 어머니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