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경화회관] 농민운동의 선구자 ‘愚石’을 기리다

by 홈페이지관리자 posted Aug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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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경화회관 준공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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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0일, 경남 창녕의 주민들은 모처럼 축제와도 같은 하루 를 즐겼다. 이 지역 농민운동의 선구자였던 우석 성재경 탄생 100 주년기념 동상제막식과 그가 주도한 농민운동의 산실인 경화회관 준공식이 열린 날이다. 

 

성재경은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농촌 계몽가이 자 실천가였다. 1916년 창녕군 대지면 석리에서 태어나 진주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동경법정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지식 인이다. 1942년에 귀국해 일본징병을 피하기 위해 23세에 창녕군 면장을 맡았다. 해방이 되자 25세에 서울에서 대성출판사를 창업 해 운영하면서 정계의 손짓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석은 양명의 유혹을 완강히 거부하고 고향에서 입신하기로 결심, 농민 을 잘 살게 해야 한다는 소명을 실천해갔다. 그가 주목한 것은 환 금 작물인 양파. 만석꾼의 외아들이자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젊은 우석이 양파 밭에서 농민들과 뒹굴며 재배에 앞장서자 농민들이 호응해왔다. ‘양파가 돈이 된다’는 말에 귀를 기울여 따르기 시작
한 것이다. 그의 부친이 이미 1909년에 한국 최초로 양파 씨를 들여 와 실험 재배하는 것을 목격한 덕분이기도 했다. 창녕이 한때 우리 나라 양파 생산량의 50퍼센트를 점유할 정도로 큰 집산지가 되고 창녕 주민들의 소득이 높아진 계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63년 2 월에는 마침내, 창녕 주민 26명과 뜻을 합해 사단법인 경화회를 결 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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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가까운 곳, 일상생활에 있 다. 과학적인 농사기술을 공부하고 서로 잘못하는 바가 있으면 고 쳐주며 우리들 경화회원은 물론 창녕 농민 전체, 나아가서는 나라 에 이바지한다”고 그는 출발의 각오를 경화의 소식지에 적어 남겼다. 각자 도시락을 지참하는 월례회 모임을 추진했다.  농사기술 교육과 소식지 <경화회보>의 발간은 50여 년간 한 번도 거르지 않 고 이어졌다. 1969년경에는 6천여 농가가 재배하는 밭이 1천여 헥 타아르에 달해 전국 최고의 양파 주산지가 됐다. 냉장시설을 도입 해 양파를 4계절 공급할 수 있도록 한 것도 탁월한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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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우석은 주민회관의 필요성을 느껴 창녕군 창녕읍 직교리, 화왕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터를 마련했다. 이후 경화회관은 마을 사람들의 결혼식, 각종 회합과 교육장으로 주민과 함께하는 세월 을 보냈다. 경화회관을 짓는 과정에서 그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 여의식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대역사이니만큼 그가 거금을 쾌 척해 지을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우리들 모두의 집인 만 큼 다소 빚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난한 호주머니를 열어 우리 힘 으로 짓자. 그래야만 보람이 있고, 떳떳하고 진정한 우리 집이 된 다”고 설득했다. (1977년 2월 26일자 경화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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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화회에서 나오는 이익금을 한 푼도 가져가지 않았음은 물 론, 1980년 향년 65세에 영면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소유한 협성농 산 주식 25퍼센트를 경화회에 기부했다. “우둔한 내가 여러 동지들과 힘을 합해 경화회를 창립하고 헌신한 생활에 한 점 후회가 없다. 생애를 바쳐 겨레의 거친 밭을 가는 기 꺼움, 경화회를 이끌어가는 기쁨과 행복이야말로 하늘 아래 무엇 에 비할 수 있을까”라고 소감을 남긴다. 78년에 완공된 회관이 낡고 협소해졌다. 우석의 아들 성기학(영원무역 회장)이 아버지를 기려 증·개축하기로 결심. 마침내 지난 5월, 원래 있던 건물을 헐고 지상 3층 (건평 1100평)의 현대식 건물을 지어 기증한 것이다. 1,200명의 경화회원들의 집회, 교육, 문화의 장소로 거듭나 회원은 물론 주민 들의 축제의 장이 됐다. 건물 짓는 데만 70억이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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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954명이 십시일반 모금해 우석의 동상을 만들어 회관 뒤편에 기증한 것도 고인이 기뻐할 일일 것이다. 동상 옆에는 김영화 6만 원, 신종옥 7만원… 등 동상제작비 기부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 혀 있어 고인의 뜻이 후대의 고향사람들에게 면면히 이어져왔음 을 느끼게 한다.  성기학 회장은 “선친이 지금 제일 좋아하실 일이 무얼까 생각해보니 경화회관을 새로 짓는 일이 아닐까 싶었습니 다. 농민 자조, 증산, 문화운동에 평생을 바치셨으니까요. 경제학 도였는데, 양파농사를 짓기 위해 일본에서 책을 천 권씩 사다 읽으 시면서 실사구시 정신을 실천하셨어요. 저는 서울로 유학을 갔지 만 방학이면 고향에 내려와 거들었어요.  동네 어르신들하고 종자 를 선별해 포장하고 시장에 출하하고, 은행 심부름도 하고…. “ 창녕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금까지 성씨 집안과 깊은 연대를 맺으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에 최 부잣집이 있다면 창녕엔 성 부잣집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석의 증조부(성찬영)는 1876년 흉년 이 들자 땅을 팔아 빈민을 구제하는 적선지가의 면모 를 보였고, 미곡상이었던 선친(성낙안)은 일제강점 기에 사재로 지양(池陽) 강습소라는 학교를 만들어 인재 양성에 앞장섰다. 3천여 평의 대지에 교실 4개, 운동장을 갖춘 현대식 교육시설이었으며, 남녀학생 3 백 명이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받았다. 지양 강습소는 식민지교육을 시키려는 일본의 탄압으로 1929년 폐교되었다. 6·25전쟁 전후로 옛 지주들이 고향 에서 힘들었을 때도 성씨 집안 사람들이 아무런 피해 를 입지 않은 것은 다 그러한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할 것이다.

 

강주진 前 고려대교수는 “해방 후 웬만한 사람들이 장관이나 한자리 해볼까 싶어 정치판을 기웃거릴 당 시 우석 성재경은 그쪽으로는 얼굴 한 번 비치지 않고 시골로만 뻔질나게 다녔어요. 경화회는 새마을운동 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 되기 이미 10년 전부터 그 이념을 실현하고 있었어요” 라고 회상했다. 새마을운동은 심볼마크도 경화회의 마크를 모방할 정도로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다. 성씨 집안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오늘날에도 이어 지고 있다. 성기학 회장은 “경화회관은 단지 기증한 것일 뿐, 법인에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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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회는 어디까지나 창녕 주민들의 자치 자족 모 임이라는 것이다.  조상의 영향을 받은 그 역시 다각도 로 사회공헌에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사단 법인 선농문화포럼이다. 지난 2011년에 창립한 선농 문화포럼은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교양강 좌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데, 이를 “거대한 자원봉사 조직으로 발전시키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끝없 이 밭을 갈고, 화합하는 경(耕)과 화(和)의 정신은 지 금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