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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 음식과 그릇들이 어지러이 나뒹굴고 있다. 누군가가 식사를 마친 후 뒷정리를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뜬 듯한 풍경이다. 식탁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베네치아산의 투명한 물잔과 가로 누운 은제 식기들이다. 왼편에는 두 개의 복숭아가 있는데 나뭇가지가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 가지에서 따낸 듯하다. 그 앞에는 중국에서 수입된 듯한 청화백자 접시가 보이고 그위에는 절인 올리브 열매가 식욕을 돋군다. 다시 그 오른쪽에는 훈제 햄이 놓여 있다. 또 바닥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식탁보 위에는 빵이 위태위태하게 놓여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이국적인 물건들로 보아 테이블의 주인공은 부유한 상인계급의 부르주아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그림은 바로크시대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인 빌럼 클라스 헤다(1594-1680)가 그린 ‘정물’이라는 작품이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수많은 정물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당시 얼마나 많은 정물화가 그려졌는지는 유럽 유수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가득 메운 작품들만 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관람객들은 가득 메운 정물화의 홍수 앞에 당혹감과 함께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들 중 상당수는 17, 18세기 네덜란드에서 그려진 것들이다. 꽃을 그린 것, 사냥터에서 잡아온 새와 짐승을 그린 것, 음식을 그린 것 등 종류도 다양하다. 그렇다면 네덜란드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 정물화를 그렸던 것일까? 17세기에 이탈리아, 프랑스 등 서양미술의 본고장에서 화가들이 반종교개혁의 이념을 쫓아 한창 기독교 주제에 매진하고 있을 때 이 북구의 ‘저지대 사람(네덜란드인)들’은 어째서 정물화, 초상화 같은 아주 세속적이고 장식적인 그림에만 매달렸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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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플랑드르의 화가들도 16세기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화가들 못지않게 열심히 종교화를 그려댔다. 미술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로지에 반 데를 바이덴, 휴고 반 데르 고스, 로베르 캉팽 같은 종교화의 대가들이 남긴 명품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17세기의 예기치 않은 반전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바로 종교개혁 때문이었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부패한 가톨릭 교단의 자성을 촉구하며 신앙의 근본정신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한 프로테스탄티즘, 이른바 개신교 운동의 결과였다. 플랑드르(오늘의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도 프로테스탄티즘의 유입과 함께 이를 지지하는 공화파와 전통 가톨릭을 지지하는 왕당파 사이에 지루한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결국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하는 플랑드르 북부지역에서는 개신교가 승기를 잡았고, 오늘의 벨기에에 해당하는 남부지역에서는 가톨릭의 우위가 지속됐다.

신교 세력이 가톨릭 세력을 몰아낸 북부에서는 종교미술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지도부는 교회의 사치와 성직자의 부패를 경계하는 한편 중세시대의 성상금지령에 버금가는 조치를 내려 교회 안에서 형상의 추방을 결의한다. 기존 성당 벽과 천정을 장식한 신의 형상과 성자의 이미지는 모조리 파괴됐다. 교회의 주문에 의지해 생계를 유지해 온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이런 조치는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화가들은 고심 끝에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겨냥한 벽걸이 액자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한다.

다행히 하늘은 그들을 완전히 져버리지 않았다. 17세기의 네덜란드는 전 세계를 연결하는 동인도회사의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희귀한 물건들이 집중되고 다시 수요처로 배분되는 허브로 번영했다. 당연히 중개무역으로 재미를 본 상인계급이 두텁게 형성됐다. 큰돈을 만지게 된 빌렘 클라츠 헤다, 정물, 1651년, 나무판 위에 유채, 9983cm, 리히텐슈타인 공작 미술관 이들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는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는 집안 장식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벼락부자들이 부를 과시하는 데는 아무래도 그림이 제격이었다. 그러나 복잡한 상징 코드가 얽힌 역사화라든가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은 품격 있는 그림으로 인식되긴 했지만 인문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상인계급에겐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대상을 묘사한 정물화가 그들의 소박한 기호에는 제격이었다. 초상화와 장르화(풍속화)도 인기를 누렸지만 좀 더 폭넓은 인기를 누린 것은 정물화였다.

그러나 이 상인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이 청교도임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대 귀족들처럼 엄청난 크기의 그림으로 자신들의 부와 권세를 과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장식적인 그림 속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현세의 영화가 한시적인 것임을 잊지 말라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앞서 언급한 헤다의 ‘정물’은 풍족한 아침식탁을 그린 것이지만 그 위에 놓인 유리잔은 깨지기 쉬운 것이고 은제 컵은 금방이라고 식탁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같다. 방금 가지에서 잘려나온 복숭아는 생명을 다한 것이고 빵과 햄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부패할 수 밖에 없다. 모든 게 다 불안하고 한시적이다. 결국 헤다의 정물화는 겉으론 현세의 풍요를 예찬하고 있지만 실은 인간 삶의 덧없음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은 보스하르트가 그린 화려한 꽃 정물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창문턱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꽃병의 아름다운 꽃들은 조만간 시들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유럽의 미술관을 메운 수많은 정물화는 17, 18세기 네덜란드의 번영의 과정에서 탄생한 독특한 장르로 집안을 장식하려는 세속적인 욕구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기독교 신앙의 근본정신을 잊지 않으려는 청교도 정신이 결합된 네덜란드 인의 지혜의 산물인 것이다.

 

글 정석범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파리1대학 미술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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