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경쟁과 개인, 시장’에 거부감을 보이는 반면 ‘연대와 협동, 단결, 공동체’등의 단어에는 친숙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에 답이 있다. 수백만 년의 인류 역사를 24시간으로 환산할 경우, 시장이나 경쟁이 나타난 시간은 23시 57분’이라고 한다. 인류는 24시간 중 23시간 57분 동안을 원시공동체 속에서 단결과 협동, 연대를 생명처럼 여기며 살았다. 인류가 시장과 경쟁, 개인을 경험한 것은 불과 3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뇌리에는 공동체와 단결이라는 ‘문화적 유전자’가 이미 깊이 새겨진 터이다.
원시 공동체에 대한 향수
‘코사(Xhosa)족’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남부에 사는 종족이다. 인류학자가 코사족 아이들에게 게임을 신청했다. 그는 과일 바구니를 나무에 매달아 놓고, 제일 먼저 도착한 아이에게 그 바구니를 상(賞)으로 주겠노라고 했다. 그가 “달려라!”라고 하자, 뜻밖에 아이들은 모두 손을 잡아 함께 달리고 함께 앉아 함께 과일을 즐겼다. 인류학자는 “어째서 그렇게 달리는 방법을 선택했니? 한 명이 전부 받을 수 있었는데…”라고 물으니 아이들은 “다른 사람이 모두 슬픈데 어째서 한 명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승자독식이 아닌 나눔, 경쟁이 아닌 배려가 묻어나는 정경이다.
하지만 인간다움은 여기까지다. 아이들은 바구니 속의 과일을 나눠 행복해졌을 수 있으나, 그 중 어떤 아이가 가장 달리기를 잘 하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을 공평하게 나누면, 수영을 잘 하는 아이가 잡은 물고기와 나무를 잘 타서 딴 과일이 교환될 수 없다. 공동생산과 공동소유를 하는 사회에서는 분업과 교환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야기 속의 ‘바구니’는 그것이 어디에 있고 과일이 얼마나 있는지 알려져 있지만, 현실에서의 바구니는, 그런 것이 있기는 한지, 있다면 그것이 어디에 있고, 얼마나 있으며, 어떤 경로를 통해 접근해야 발견할 수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원시공동체가 아닌 거대한 교환이 이루어지는 익명의 세계에 살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 바구니의 위치를 알려 준 인류학자와 같은 계획 체는 없다. 자신의 삶을 집단이 아닌 개인이 책임지는 것은 원시본능을 극복한 문명인의 징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의 향수에 젖어있다. ‘사회’가 자신의 경제적 처지를 책임져 주기를 부지불식간에 바라고 있다. 하지만 사회는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를 ‘국가’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국가간섭주의’의 폐해
상론할 겨를은 없지만 ‘자유주의’는 역사적으로 볼 때 특정집단이 아닌 ‘모든 사람’의 복리를 증진시키고자 한 최초의 정치운동이었다. 자유주의가 절대 전제정치 대신 입헌 대의정치 제도를 수립해 농노제도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예속을 타파하고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키고자 한 것은, 자유노동이 노예노동과 견줄 수 없는 만큼의 생산성을 발휘케 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재산권과 계약의 자유’를 인정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신분사회에 ‘역동성’을 불어 넣어 줌으로써 인류의 물질적 생활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자유는 인간의 구조적 무지(inevitable ignorance)를 전제로 한다’는 하이에크(F. Hayek) 예지를 통해 ‘자유의 의미’를 반추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전지전능하다면 그 사람의 뒤를 쫓으면 되지만 누구도 전지전능하지 않다. 대신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제일 정통하다. 따라서 각자 지식범위 내에서 분권화된 행동을 허용하는 자체가 ‘그 사회의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지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시도가 행해지도록’ 개인에게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자유는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 그리고 타인의 자유 침해금지’를 요체로 한다.
‘지식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규제당국에도 공히 적용된다. 규제당국은 시장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특정계층을 보호하기 위한 ‘처분적 규제’가 난무하는 것도 이 같은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의무휴일을 지정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 같은 규제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동(牧童)이 양을 몰듯이 정책당국이 규제로 고객을 몰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시장은 활성화되지 않고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불편하다. 대형 마트에 연결된 농산물 납품업자, 계산원, 그리고 아르바이트생 등에게 예기치 않은 피해가 돌아간다. 규제당국이 서로 상충되는 이해집단 간의 이해를 ‘규제로 조정할 만큼의 지식과 정보를 갖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난망이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을 규제당국이 지정하는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 역시 말이 안 된다. 규제당국은 그런
지식을 갖지 못한다. 영세 ‘가맹점주’를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개정된 프랜차이즈법도 부작용이 우려된다. 가맹본부를 옥조이면 더 이상의 가맹본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맹점주 입장에서 그들이 계약할 수 있는 가맹본부가 적게 만들어지면 그만큼 가맹점주가 불리해진다. 규제당국이 할 일은 ‘공정거래가 이루어지도록 울타리’를 쌓는 것이다. 규제당국이 승자와 패자를 선정해서는 안 된다.
정책은 ‘원칙’(principle)의 문제
정책은 특정계층의 이익을 보호하는 ‘편의’(expedience)의 문제가 아니다. 원칙에 어긋나는 것을 여론과 규제로 관철시키려하면, ‘상식’(common sense) 대신 ‘통념화된 몰상식’(common nonsense)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최근 풍미하고 있는 ‘경제민주화’도 ‘시장 위에 정치를 위치시키려는 국가개입주의’에 다름 아니다. 국가개입주의는 ‘지대추구행위’를 부르고 개인의 ‘사(私)영역’을 그만큼 위축시킨다. 국가개입주의는 자유주의의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다. ‘개인의 삶’은 개인이 책임지는 것이 ‘원칙’이다. 개인의 자존과 자립이 ‘국가의 책임’ 뒤에 놓여서는 안 된다. 국가가 개인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