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문가(名門家)
글 조용헌 (동양학자,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명문가는 전통고택을 보유한 집안이다.
어떤 집안을 명문가로 볼 수 있는가. 보는 관점에 따라 매우 다양한 기준이 적용될 수 있겠지만, 필자는 전통 고택을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으면 명문가라고 생각된다. 어떤 집안이 전통고택을 현재까지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첫째는 재력이다. 재력이 없으면 수천평의 대지에 평균 50-60칸에 달하는 기와집을 유지할 수 없다. 이정도의 고택을 유지관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력이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를 상징하기도 한다.
둘째는 역사와 전통이다. 고택들은 1백년에서 - 5백년까지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에 해당되는 건물들이기도 하다. 고색 창연한 문화재급 건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 집안이 거기에 비례하는 전통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명문가의 기준가운데 하나는 자기나라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이다. 고택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생활자체가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세 번째는 긍지와 자존심이다. 아파트로 옮기지 않고 생활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전통고택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자존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자존심이란 자신들의 선조와 집안에 대한 긍지이기도 하다.
네 번째는 도덕성이다. 동학, 일제 36년, 6.25와 같은 역사적 전환기에 이러한 집들이 훼손되거나 불타지 않고 현재까지 유지되어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도덕성이 바탕에 깔려 있다.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존경받지 못한 집들은 역사적 전환기에 불타거나 사라졌다. 현재까지 유지된다는 사실을 뒤집어 보면 그만큼 검증 받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3대 명택
우리나라 3대 명택은 강릉선교장(船橋莊), 구례 운조루(雲鳥樓), 창녕 아석헌(我石軒)이다. 선교장은 현재 120칸의 저택이다. 무려 50m 길이의 일자형 행랑채, 집 뒤의 600년 된 소나무, 집 앞에 있는 활래정(活來亭)과 홍련, 그리고 집 옆에 있는 경포대의 풍광을 종합하면 ‘관동제일저택’이다. 관동지방이 우리나라 풍광의 제일이라고 하는데, 선교장은 관동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집의 규모가 크고 웅장해서 ‘장급(莊級)저택’이란 이런 것 이구나를 실감하게 한다. 가장 럭셔리한 저택이다.
구례의 운조루는 집 자체보다는 그 터가 장엄하다. 집 뒤의 배산(背山)이 바로 지리산 아닌가. 백두대간에서 내려온 지맥이 지리산에서 크게 융기하여 뭉쳤는데, 이 백두대간 기운이 집 뒤에 뭉쳐 있다. 집 앞을 감아 도는 섬진강은 은빛으로 빛난다. 그 가운데에 들판이 있어서 답답하지도 않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고, 들판이 있어서 배고프지도 않은 터이다.
창녕의 아석헌은 일명 ‘성부자집’으로 불린다. 집 뒤의 동산은 지네가 꿈틀꿈틀 내려오고 있는 형국이다. 이름을 붙여본다면 ‘지네가 닭을마주보고 있는’ 오공대계(蜈蚣對鷄)의 자리라고나 할까. 앞에는 화기가 충만한 756m의 화왕산(火旺山)이 집터를 보고 있다. 화왕산의 오른쪽은 삼각형 봉우리가 있어서 문필봉으로 작용한다. 집 앞으로 전개된 수백만 평의 ‘어물리 뜰’은 풍요와 호방함을 준다. 아석헌의 복원이 완공되면 약 200칸에 해당한다고 하니, 그 건물 규모도 선교장과 쌍벽을 이룰 듯하다. 창녕 성부자집은 선교장과 운조루의 장점을 모아 놓은 고택이다.
조용헌 (동양학자,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교수의 <한국의 명문가(名門家)>는 오는 9월 20일 진행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바랍니다. 자세한 사항은 선농소식 7page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