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넬스키의 달걀

by 선농문화포럼. posted Jan 2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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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은
한사랑의원 원장
대한의사협회 정책자문위원
 
피렌체 도시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은 피렌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우리에게는 듀오모로 알려져 있는데 듀오모는 대성당을 의미하는 말로 주교가 있는 대성당을 카테드랄 또는 듀오모라 한다. 이 성당은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작은 성당을 개축해 83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379년 건축 이 완공됐다. 성당의 세로 건축물과 가로 건축물이 교차하는 지름 45m의 거대한 구멍을 돔으로 마무리하는 공사는 당시의 기술로 불가능했다. 그로부터 41년이 경과했다. 피렌체 공국의 당국자는 돔을 완성시키기 위해 여러 건축가들에게 공모하였으나 아무도 그 거대한 돔을 올릴 아이디어가 없었다. 당시 경쟁을 주관하는 당국에서 경쟁에 참여한 건축가들에게 준 시험 과제는 계란을 대리석 위에 똑바로 세우라는 것이었는데 모두 실패했고 브루넬스키만 성공했다.
브루넬스키가 계란 한쪽 끝을 대리석 바닥에 쳐 깨뜨리자 계란이 똑바로 섰다. 그것을 본 다른 참가자들이 그렇게 하면 누가 못 세우겠느냐며 항의했다. 그러자 브루넬스키가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들이 내 돔 설계안을 봤다면 그런 식으로는 나도 할 수 있다 고 말했을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만, 콜럼버스의 계 란 보다 브루넬스키의 계란이 먼저이다. 그가 콜럼버스 이전의 사람이니까. 사실 콜럼버스가 계란을 세웠다는 기록은 불분명하다. 콜럼버스가 말을 했다면 아마도 브루넬스키를 모방했을 것이다. 브루넬스키는 1420년에 돔을 올리기 시작하여 1436년에 완성했다. 그의 설계는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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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구형이 아닌 타원형의 구형을 선택했다.
2. 돔을 쌓기 위해 가로 세로로 우산살 같은 Rib(갈비뼈)을 교차 시켰다.
3. 돔의 구조를 내부와 외부의 이중 구조로 처리함으로 하중과 팽창하는 힘을 견디는 거대한 돔을 올렸다.
 
그는 400만 장의 벽돌과 석재를 올리기 위해 거중기를 개발했다. 이 기술은 150년 후 미켈란젤로에게 전수되어 그가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을 짓는 모델이 됐다. 돔의 실내장식은 모자이크 장식으로 덮을 예정이었다. 브루넬스키는 찬란한 금과 함께 둥근 천장이 희미하게 빛나야 한다고 했지만, 1446년 그의 죽음으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돔 내부는 하얀색으로 칠해졌다. 피렌체의 코시모 데 메디치 대공은 돔에 마지막 심판의 그림을 묘사하도록 주문했다. 3600 평방 미터의 넓이에 채색할 이 방대한 작업은 조르조 바사리와 페데리코 추카리에 의해 1568부터 1579년까지 계속됐다. 랜턴에서 가까운 위쪽 부분은 요한의 묵시록 4장의 스물 네 명의 장로를 묘사한 것으로 1574년 바사리가 죽기 전에 완성 했다. 페데리코 추카리와 도메니코 크레스티는 다른 부분들을 완성했다. 천사들의 합창,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들, 덕, 성령의 선물들, 더없는 행복, 그리고 돔의 맨 아랫부분에는 죄와 지옥이 있다. 이 프레스코화들은 추카리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로 꼽힌다. 그러나 작품의 질은 시기별 예술가의 수준과 그들의 서로 다른 기교들 때문에 균등하지 않았다. 바사리는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리는 프레스코(buon fresco) 기법으로 그렸고 추카리는 회반죽이 마른 후 그리는 프레스코-세코(Fresco-secco) 기법으로 그렸다.
브루넬스키의 큐폴라를 체험하기 위해 첨탑을 향해 출발했다. 통로는 돔의 외벽과 내벽 사이의 공간에 나 있고 나선형의 계단을 통해 전망대로 올라가게 돼 있었다. 한여름에 100m 높이의 계단 을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돔의 정상에서 보는 피렌체의 전경은 현대가 아닌 온전히 중세 도시의 풍경이었다. 특히 팔각형 모양의 외부 돔을 이루고 있는 아치형 석재 리브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튼튼하다. 브루넬스키는 이 돔을 올리기 위해 로마의 판테온과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 대성당의 돔을 연구했다. 판테온과 같이 석재로 아치 돔을 만들면 돔의 무게를 이기기 위해 벽의 두께가 두꺼워지고 창문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천상을 구현하 는 성당의 돔에 빛이 들어올 수 없었다.
빛이 통하는 창을 내기 위해서는 보다 가벼운 소재를 사용하여 벽을 얇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한다. 외벽의 소재는 벽돌이었으며 아치 형태로 쌓아 올리면서 몇 번이고 무너지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나서 성공했다. 전체 모양과 돔을 보기에 적절한 장소가 성당 우측에 있는 지오토의 종탑이다. 이곳도 힘들게 오르기는 마 찬가지이다. 종탑 상부에서 같은 눈높이로 성당을 버드 뷰로 내려 볼 수 있다. 당시 수많은 인재들이 좌절을 겪으면서 성당과 종탑을 완성 했다. 종탑에서 아침을 알 리는 종이 울리면 시민들은 잠에서 깨어나 일터로 나섰다.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휴식을 취하며 허기를 달래고 다시 저녁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감사기도를 올리고 집으로 향했다. 종 치는 시간을 결정하는 시계는 성당 내부에 있다. 이 시계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12시간 형태의 시계가 아니고 24시간으로 구분되고 시계의 시침이 진행하는 방향도 지금의 시계와 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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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형태의 시계를 개발하는 데는 시간을 알기 위한 의도가 아닌 항해 중인 배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GPS가 필요 하였기 때문이다. 비가 오고 하늘이 흐린 날에는 별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선장의 육감과 경험을 따라 항해하다 난파를 당했다. 영국 해운국에서 항해 중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장비를 개발하는 사람에게 40 억 원의 포상금을 걸었다. 해가 지나는 적도를 0으로 잡고 15도 씩 북반구를 6개, 남반구를 6개로 나누고 위도를 정했 다. 위도는 정오에 해의 위치를 보고 분도기로 확인했다. 경도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본초자오선을 그어 기준으로 하고 그리니치에 있는 시계에다 시간을 맞춘다. 그리고 항해하는 장소의 정오(12시)를 해시계로 측정한 후 그리니치 시계와 같은 시계를 비교한다. 두 시간 빠르면 삼십도 동으로 더 갔고 늦으면 서쪽으 로 더 가서 위치한 것이다. Time은 영국과 미국의 유명한 저널리즘이지만 한때는 그리니치 천문대의 시간을 알려주는 시간 장사 들이었다
필요와 욕구는 발명과 발견의 어머니이다. 엄밀히 말하면 창조는 없고 옛 지식을 응용하고 다른 발명을 서로 융합하는 편집의 기술이다. 피렌체 듀오모의 돔과 지오토의 종탑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 지 노력하는 인간의 결과물이다. 천주께서 브루넬리스키의 꿈에 나타나 가르쳐준 신통한 걸작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