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선농문화포럼. posted Aug 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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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로 변신한

성악가 고희전

 

 

 

 

코로나로 더없이 길게 느껴지던 장마에 문자 한통 이왔다.

 

“ 성악가 고희 전입니다. 6월부터 기존에 해왔던 연주회를 다시 진행하려고합니다. 아울러 우리동네 파바로티 이 룸카페에 스파게티와 화덕피자 메뉴를 추가해 식 사도 가능하도록 준비했습니다. 앞으로 연주회 일 정이나오면소식전해드리겠습니다”

 

연전에 선농문화포럼 오페라 강좌를 기획하면서 성악가 고희전씨와 가끔 연락을 주고받던 차라 요 리사로 변신한 그가 궁금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고전날밤부터장맛비가쉴새없이쏟아지고있었 다. 하지만고희전씨가 5년간의독일유학에서돌아 와 2018년부터 자리를 잡은 안성으로 가기위해 안 성행버스에몸을 실었다.

 

안성터미널에서 택시를 갈아타고 10여분 만에 복 거마을 극장식 ‘이룸’ 카페 입구 앞에 도착했다. 마 침 TV에서만 봤던 고희전씨를 붕어빵처럼 꼭 닮은 둘째딸 하임이가 일행을 반겼다. 고희전씨는 독일 만하임 국립음대를 졸업했는데 유학시절 얻은 딸 이라 하임이라고 지었단다. 고희전씨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우선 안성토박이인 그가 어떻게 성 악가의길을걷게됐는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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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안성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제가 좀 순진하고 착해보였는지 우리 반 덩치 큰 애들이 때 리거나 *빵셔틀을 시키는 일이 잦았습니다. 학교폭 력피해자였죠. 스트레스가심했던지어린나이에위 장병도 생기고 학교에 가기 싫어서 하루 종일 집에 서 기타를 치는 날이 많았습니다. 이후 안법고등학 교 (*사진: 안성포도 최초 전래자인 프랑스 공안국 신부님이 세운 111년 전통의 학 교)에 진학했는데 중학교 때 갈고닦은 기타 연주와 타고난노래실력이빛을발했습니다. 당시안성시내 고등학교 축제마다 초청 1순위로 불려 다닐 정도로 인기가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중학교때학폭으로 쭈그러졌던마음이좀펴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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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덕분에 잃었던 자존감을 되찾고 보니 음대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슬금슬금 생겨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기술이 있어야 평생 먹고 산다는 게 부친의 소신이었다. 결국 부친의 뜻에 따 라 공대 기계과에 입학했지만 인문계 고교 출신인 그가 공고를 졸업한 친구들의 손기술을 따라가기 는 힘들었다. 쇠를 깎는 기계 소음도 듣기 싫었고, 적성도맞지않아한학기를마치고바로학교를그 만뒀다. 이후 입대한 철원 백골부대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서야 자신의 뜻대로 백석대 성악과에 진학 할 수 있었다. 대학시절 교수님과 친구들과 함께 독 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는데 졸업 후 성악공부를 계속하고 싶던 고희전씨도 7년 연애 끝에 결혼한 아내 조유진씨와 백일된 딸을 데리고 2006년 1월, 독일만하임으로날아갔다.

 

처자식 딸린 가장으로 외국에서 공부하는 게 어려 웠을텐데유학비용은어떻게마련했습니까?

 

“20여 년간 면사무소 기능직 공무원(소사)으로 근무하시다 은퇴한 아버지(1946년生)께서 퇴직 후에 도 겨울에는 산불감시, 여름에는 쓰레기투기 감시 등 허드렛일을 계속하시면서 아들 유학비를 마련 해주셨습니다. 어머니도 안성탕면으로 유명한 라 면공장에서 일하면서 월급을 보태 5년간 매월 250 만원씩 보내주셨습니다. 제가 1남3녀 중 막내아들 인데 나중에 들으니 당시 누나들은 부모님을 고생 시키는 저를 원망했다고 하더라고요”

 

2010년에 만하임에서 둘째딸이 태어났는데 가난한 유학생활에 아내의 산후간병은 고스란히 고희전씨 몫이었다. 미역국 끓여가며 열심히 산모의 산후 조 리를 하다 보니 그만 학교에서 한 학기 유급통보를 받았다. 허리띠를 졸라가며 어렵게 학비를 부쳐주는 부모님 생각에 항상 죄송스런 마음을 갖고 있었 는데, 졸업이 6개월이나 미뤄지니 마주한 현실이 영 답답하기만했다. 마침스위스에서열리는국제콩쿨 에 나갔는데 지원자 50명 중 2등을 했다. 제네바 극 장에서의공연경험은그에게잊을수없는추억이자 자산이다. 우여곡절끝에학교를졸업하고 2012년에 귀국했지만 고희전씨가 설 무대는 없었다. 어쩌면 1등만을 기억하는 세상에서 좌절할 수도 있었으나 그에게는 ‘나만의 극장’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다. 고향 안성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 고관원씨(74세) 가 평생 성실하게 농사짓던 100여 평의 고추밭에 벽 돌을 한 장 한 장 쌓고 산에서 벌목한 아름드리나무 로 손수 테이블을 만들어가며 극장식 카페를 세웠 다. 지난해 KBS 인간극장에 소개 된 대로 그는 딸이 다니는 유치원과 안성 초등학교 입학식에 이르기까 지 무대를 가리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고향 집 터에 그가 손수 세운 극장에서 그동안 20회의 ‘우리 동네 콘서트’를 연 성악가 고희전씨에게 음악과 생 계사이에서호구지책은여전히난감한숙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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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많은 공연 기획사들이 사라지고 음악생 활과 연주자 개런티만으로 생활이 어려운 현실에 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더욱 확 고해졌습니다. 안성 인근 동아방송예술대학에 출 강하고 있는데 예술을 전공하는 청년들에게 나의 모습을 통해서 꼭 상위 1%가 되지 않아도 낙오자 가 아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후배들에게 음악은 삶의 전부가 아 닌 인생의 도구일 뿐이 므로 큰 꿈을 내려놓고 열심히 살다보면 자연 스럽게 무대가 생길 수 있다고… 2호점, 3호점 이룸카페 주인장이 나 올 수 있도록 돕고 싶 습니다.”

 

우중에도 카페를 가득 메웠던 손님들이 돌아가고 점심시간을훌쩍넘긴 3시쯤배가고프다며주방에 서손수만들어내온파스타와피자는맛있었다.

지난해 연말에는 고희전씨 주최로 루마니아 필하모니를 초청해 안성시 최초로 해외오 케스트라 초청공연을 열었다. (사진上) 7월 말에는 코로나로 중단됐던 동네음악회도 재개했다. ‘꿈을 이루다’ 라는 의미로 명명했다는 ‘이룸카페’를 통 해그의꿈은한발씩전진하고있었다.

 

 

 

 

 

 

 

 

 

 

 

 

 

 

 

 

 

 

 

 

글• 사진 선농문화포럼부장임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