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선농문화포럼 posted Apr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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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국의 조건이라면 보통 땅과 사람을 꼽는다. 그러나 실은 그 두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게 역사다. 땅이 좁고 사람이 적어도 강국인 나라가 있고, 반대로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도 강국이 되지 못하는 나라가 있다. 그렇게 보면 한국이 강국의 조건에서 가장 자격미달인 분야는 땅이나 사람보다 역사다. 한국은 자원이 풍부하지는 않으나 그런대로 식량 자급이 가능할 만큼의 땅이 있고, 사람은 높은 인구밀도가 말해주듯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데다 전통적으로 교육열이 높아 문맹률이 거의 제로다. 그런데도 강국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가 약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역사는 고정불변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역전과 반전이 가능하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의 비판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현재까지 흔적을 남기고 있는 부정적 요소를 바로잡지 않고서 향상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것은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국가에게도 상식이다.

장차 엄정하고 체계적인 토대에서 정식 한국사 비판이 이루어져야겠지만, 일단 그 단초로 한국사 전체를 관류하는 몇 가지 비판 요소를 추출해보자.

 

우선 단군신화와 고조선의 문제가 있다. 세계 대다수 민족의 신화는 창세부터 시작하는 데 비해 단군신화는 특이하게도 건국, 즉 왕조를 개창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 역사가 지배계급의 존재감이 압도적으로 전개된 이유에는 역사의 첫 단추인 신화부터 그렇게 시작하는 탓이 크다. 피지배 민중의 역사는 처음부터 은폐되어온 셈이다. 사실 단군의 존재를 인정한다 해도 우리 민족의 시조는 단군이 아니라 그가 나라를 세울 때 이미 한반도에 살고 있었던 피지배 민중이 된다.

과거의 역사에 오늘의 잣대를 적용하면 시대착오를 넘어 범주착각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흔히 교과서에서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은 삼국시대에 부쩍 흥미를 보이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부터 역사에 흥미를 잃는다. 아마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굴욕적인 통일을 이루었다는 생각 때문일 텐데, 당시에는 대한민국도, 중국도 없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고대 삼국 간에 동질적인 민족의식이 확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근대적 의미의 ‘민족’이나 ‘외세’의 개념으로 7세기의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역사를 윤색하는 큰 잘못이다.

 

서양의 역사학자들이 동양의 역사를 알면 크게 놀라는 요소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고대부터 중앙집권제가 발달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과거제다. 이두 가지가 고대와 중세까지 선진적 사회 체제를 일구는 데 보탬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부작용도 컸다. 중앙집권제의 안정성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는 한 번도 체제 실험, 즉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과거제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사회에 전반적으로 확산시켜 혁명을 방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역사는 대단히 심각하다. 우리 역사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원정은커녕 침략자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전쟁에서조차도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친히 군대와 생사를 함께한 사례가 전무하다. 고려의 현종과 조선의 선조는 전란이 일어나자 맨 먼저 버선발로 도망친 군주들이다.

 

조선이 명실상부한 왕국이었던 시기는 초기 100년과 18세기 영·정조 시대뿐이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부터는 사실상 왕국이라기보다 사대부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한 ‘사대부국’이었다. 15~17세기까지 200년 동안 사대부들은 왕위 계승자를 직접 발탁하기도 했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쫓아내기도했다. 이들이 중앙 정치를 주무르면서 국가는 부패의 길을 걸었고, 더구나 19세기부터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황폐한 세도정치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역사 비판도 과거 역사를 오늘의 잣대로 평가한다는 오류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과거의 시점에서 볼 때도 명백한 잘못을 후대에 비판하지 않거나, 오늘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의 장기적인 폐해를 바로잡지 않으면 더 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약한 역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 약한 역사의 원인을 분석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역사가 지금까지 미치고 있는 영향력이 있다면 과감히 끊어낼 필요가 있다. 혁명이 부재했던 우리 역사에서는 한 번도 과거와의 단절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마약을 끊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부르지 않듯이, 구체제의 오랜 역사적 폐단을 근절하는 고통은 무용한 고통이 아니다.

 

강국의 다른 두 조건인 땅과 사람이 불변의 요소라면, 우리는 유일한 가변적 요소인 역사를 강화하는데 노력해야 한다. 그 선행조건이자 출발점은 바로 역사 비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