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선농문화포럼 posted Apr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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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 조상들이 너무 안이하게 살았다는 데에 화가 난다. 여기엔 큰 두 가지 사실을 상기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 첫째는 오끼나와섬 문제다. 지금은 오끼나와로 불리며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일본의 중요한 전략 포인트가 되어 있지만, 이 섬은 중세까지는 유구(琉球)왕국이라는 독립국가였다. 오끼나와는 사쳐시마섬(先島), 다이도(大東)등 3개의 큰 섬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본 본토와는720Km, 한국과는 700km의 거리에 있어 일본보다는 한국이 가까운 위치에 있다. 그래서 인지 유구왕국은 이조왕조에 사신을 보내 화친 교섭을 했다. 그러나 이조는 청나라에 그랬듯이 알지도 못하는 이 나라와 화친할 수 없다는 이유로(청나라와는 오랑캐라는 이유)거절했다.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이 섬 왕국은 결국1609 일본의 가고시마(鹿兒島)영주 시마스(島津氏)에 의해 무혈 합병 되었고 그 이후메이지와 미국군정을 거쳐 계속 일본 영토로 존속 되고 있다. 우리가 이들의 사신을 거두어 주었 다면 유구는 오늘의 위치에서 훨씬 바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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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하멜사건이다. 네덜란드인 하멜은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14년간 억류 끝에 탈출하여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써 출간함으로써 서방 세계에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멜은 1653년 네덜란드의 스페르베르(號)를 타고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끼 (長崎)로 항해하던 중 폭풍을 만나 선원64명중 28명은 익사 또는 행방불명이 되고 36명은 하멜과 함께 제주도에 표류하여 53년(8월 중순(효종4년) 조선관헌에 의해 억류되었다. 조선 관헌들은 이들을 때리고 먹을 양식도 제대로 주지 않고 학대했으며(이들은 약자였으니까) 54년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압송을 받은 중앙에서는 이들을 전라도등 전국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국민들에게 구경을 시켰다. 전라도에서 하멜이하 8명은 밤에 탈출하여 해변에 있는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하여 68년7월에 귀국하였다.

 

한편 일본으로 표류한 다른 일행은 어떠했나. 일본 막부(幕府) 정부는 이들이 먼 나라에서 동양권까지 왔으니 배 만드는 기술이 탁월할 것으로 추측하고 “배를 만들어 타고 가라”는 식으로 인심을 쓰는 척 했다. 그러나 배가 거의 만들어 졌을 무렵 배에다 불을 질러 다 태워 버리고 또 배를 만들게 함으로서 완전히 조선 기술을 습득했다. 이방인들을 이용했다는 점은 일본과 조선이 같으나 조선과 일본은 이처럼 기술을 빼내는데 차이가 있었다. 여기에 국력발전의 차이가 생긴 것이다. 이 원리는 오늘 기업을 하는 사람이나 국민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본다.

 

우리의 못난 선조들의 유구왕국(琉球王國)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새로운 것을 아예 무시하는 태도도 옳지않고, 하멜의 경우처럼 새로운 것으로 호기심만을 충족해서도 옳지 않다. 새로운 것에의 도전이란 그것을 완전히 극복 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요즘은 전자. 의류,각 기술 분야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것이 쏟아진다. 이 새 기술들에게 무한히 도전하여 이를 극복해

간다면 우리의 처지는 빠르게 발전될 것이다.